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주민들의 절규 속에 무너진 건물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인 1970년 4월 8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요일이 시작되던 새벽 6시 반에 석 달 전 준공되었던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내렸다는 속보가 나왔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사망자 34명, 부상자 40명으로 엄청난 인명사고와 건물의 완전 붕괴까지 이어졌다. 

 

와우아파트는 서울시로 몰려드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마련한 시민아파트로, 서민 주거지 해결을 위해 빠른 건립을 추진했다. 물론 취지는 좋았지만, 단기간에 많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서울시는 토대만 담당하고 이후 공사는 건설업계가 맡도록 했는데, 이에 만연했던 부패로 인해 서울시가 지정한 업계가 하청에 맡김으로써 결국 무허가 건설업자의 담당으로 넘어온 것이다. 

 

아파트를 건설할 곳으로 저렴한 곳을 찾다 보니 지반이 약한 와우산 기슭을 택했고, 지원되는 공사비도 부족한 마당에 뇌물로 사용되거나 하는 등 중간에서 떼먹어 자재가 모자랐는데, 심지어 '빨리빨리'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6개월 만에 준공되었다. 50여 년이 지난 현대의 건축 기술로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2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허술하게 지어졌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소식이 전해진 독일에서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건축공학적으로 사고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했지만, 이내 난색을 띠고 귀국해 버렸다. 별다른 건축학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두부와도 같은 부실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와우아파트는 서민 아파트를 세우기 위한 꿈으로 시작되었으나 결국 부실 공사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태가 발생함에도 부실 공사가 근절되지 않아 결국 1990년대에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며 또다시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여파인지 대한민국 건설사의 신뢰도가 추락해 2000년대 중후반까지는 건축계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는 굉장히 좁았다가 겨우 회복하게 되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는 부실 공사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반면교사이자, 주거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건축 기술의 발전에 있어 인간이 생활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의식주 중 주거 공간을 안전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새겨지는 것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