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사상 암흑의 날': 한국의 정치적 비극의 역사


1975년 4월 9일은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가 규정한 사법사상 암흑의 날(Dark day for the history of jurisdictions)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인해 정해졌다. 

 

3선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을 제정한 정권에 반발하며 정부 반대 시위가 일파만파 퍼지던 1974년, 당시 대통령은 이들의 배후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를 지목하고 연루된 이들을 조사한 끝에 180여 명을 기소했다. 이들은 가족과 변호인의 면회조차 금지된 가운데 악랄한 고문을 당했다.

 

진행된 재판마저도 국제 인권운동단체인 앰네스티의 보고서에 따르면 공정하지 못했다. 피고인과 변호인이 설명하는 충분한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마치 각본에 맞게 짜여져 있던 극을 하듯 진행되었으며, 피고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한 것이 공판조서에서 '예'로 기재되는 일도 있었다. 재판 이전부터 피고인에게는 사형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으며, 최종심은 피고인은커녕 변호인도 출석하지 않음에도 재판관만 출정하여 판결문을 읽고 상고를 기각한다는 발언으로 10분 만에 재판을 끝내고 퇴정했다. 

 

사형이 확정된 다음 날,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가족이 아침 일찍 면회를 위해 방문했다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사형수 8명은 이미 형이 집행되어 세상에 없었던 것이다. 시신에는 갖은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어 이를 숨기기 위해 유족의 동의조차 받지 않고 화장을 진행했다. 그나마 서울에 집이 있던 2명의 시신은 가족에 의해 인수되었는데, 그중 한 명의 시신에 전기고문이 자행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이후에도 연좌제가 적용된 유가족에게 주어진 갖은 수난이 이어지다가 2007년 1월에 사건과 관련된 8인에 무죄가 선고되면서 민주화 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조작된 인권유린 사건이라는 진실이 밝혀졌다. 

 

해당 사건은 1995년에 MBC에서 사법제도 10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한국의 판사 315명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통해 '우리나라 사법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꼽혔다.

 

이렇게 충분한 증거가 없음에도 사형 선고가 내려졌으며, 이해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형을 집행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거치며 사법살인과 사형제도에 대한 위험성이 제기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확립되었다.